| 저자 | 리쉰(李遜) / 손승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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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 세창출판사 |
| 발행일 | 2026-01-30 |
| 판형 | A5신 |
| ISBN | 9791166844775 |
| 페이지수 | 448P |
| 정가 | 36,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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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
이 책은 중국 문혁 10년 가운데 상하이를 핵심 대상으로 삼아, 상층 권력투쟁이 아니라 하층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문혁의 성격을 분석한다. 저자는 문혁의 본질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을 대중운동에서 찾고, 이를 베이징을 전형으로 한 홍위병운동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조반파운동이라는 두 축으로 정리한다. 홍위병운동은 1968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계기로 사실상 정리 국면에 들어갔으며, 이는 경제적 조치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된 결과였다. 노동자 조반파운동은 1968년 대연합을 전후로 대체로 마무리되었으나, 왕홍원(王洪文)이 이끈 상하이 조반파는 조직을 강화하며 문혁 전 기간 동안 핵심 대오를 유지하면서 활동을 지속했다. 한편 상하이에는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시위원회 사작조(寫作組)라는 독특한 문혁 세력이 존재해, 지역 및 전국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며 상하이 문혁을 중앙 문혁파와 긴밀히 연결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상하이 문혁은 1965년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에서 출발해 1966년 안팅(安亭) 사건, 1967년 1월 탈권(奪權), 1976년 무장반항 미수에 이르기까지 마오쩌둥 문혁 노선을 현실에서 관철하는 핵심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발생했던 주요 사건의 동기와 논리를 추적하며 상하이 문혁의 역사적 맥락을 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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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제7장 공총사의 성립: 험난한 공민(公民) 결사의 길
광공업 문혁 전개에 대한 마오의 요구 공총사 준비 회의 공총사의 탄생 붉은 천 약탈 행동 선언, 포스터, 완장 및 큰 깃발 시위의 ‘3불(三不)’ 방침 공총사 성립대회 베이징 상경 고발 소결 제8장 안팅 사건: 노동자조반파의 궐기(상) 안팅에서의 기차 저지 사건 중앙의 안팅 사건 토론 천보다의 전보 장춘차오의 안팅행 문화광장 담판 마오쩌둥의 장춘차오 지지 장춘차오의 서명 이유 쑤저우 담판 고발을 위해 북상한 전체 노동자의 상하이 복귀 제9장 안팅 사건: 노동자조반파의 궐기(하) 시위 회의에서의 의견 불일치 안팅 사건에 의해 무효로 된 중앙의 규정 왕훙원 등에 대한 시위의 조사 『공인조반보(工人造反報)』의 발행 공총사 총부의 최초 업무 분담 노동자조반파의 구성 소결 제10장 노동자 적위대(赤衛隊):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문혁 ‘2·7 전투대’ 시위와 상하이 노동자보수파 적위대로의 3개 조직 병합 노동자 ‘노보’: 왕위시(王玉璽), 천아춘 노동자 ‘노보’: 마지(馬驥) 노동자 ‘노보’: 리젠위(李劍鈺) 적위대의 신속한 발전 훙솽서우(洪雙壽) 사건과 염색24공장 사건 소결 제11장 『해방일보(解放日報)』 사건: 노동자조반파에 의한 홍위병 대체 창시핑(常溪萍)을 돌파구로 삼은 녜위안쯔(聶元梓) 『해방일보』사를 점령한 홍혁회(紅革會) 공총사의 홍혁회 지원 적위대와 공총사의 대결 시위의 두 번째 타협 입장을 바꾼 마톈수이 점령자의 신문사 철수 소결 제12장 사작반(寫作班)의 조반: 시위 심장의 폭발 사작반의 유래 시위원회 기관 간부 쉬징셴 대학 강사 주융자 당 지부 서기 궈런제(郭仁傑) 대학 교원 왕즈창 “나는 조반할 것이다”라고 선포한 주융자 사작반의 전체 회의 개최 마침내 결심한 쉬징셴 시위 기관연락처의 경험 교류 사작반의 조반 선포 소결 제13장 캉핑루(康平路) 사건: 조반파의 상하이 문혁 통솔(상) 조반파 지지로 돌아선 시위 버려진 적위대 장춘차오로부터 경고를 받은 조반파 현장 포위 공격 지휘에 나선 겅진장 상하이에서 최초로 벌어진 두 계파의 대규모 충돌 사건 장춘차오 가택 수색, 몰수 사건 캉핑루 사건과 공총사 |
| 저자 |
리쉰(李遜)
여성, 1948년생, 상하이 성인 야간학교 중문과 졸업.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하이 전기기계 공장에 배치되어 근무했으며, 약 10년 동안 도장공으로 일했다. 1978년 말부터 1992년까지 상하이시 총공회 생산부와 상하이시 총공회 노동운동연구소에서 차례로 근무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 엘리자베스 페리(Elizabeth J. Perry)와 함께 『무산계급의 역량: 상하이 문화대혁명』(Proletarian Power: Shanghai in the Cultural Revolution, Westview Press, 1997)을 집필하였고, 『혁명조반 연대: 상하이 문혁운동사고(革命造反年代: 上海文革運動史稿)』(Oxford University Press, Hongkong, 2015)를 간행하였다. 손승회(孫承會) 1961년생,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학사·석사·박사 졸업. 공주대학교,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서 시간강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한 뒤 현재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중국근현대사. 주요 저서로 『근대중국의 토비세계』(창비, 2008), 『문화대혁명과 극좌파: 마오쩌둥을 비판한 홍위병』(한울, 2019) 등이 있고, 역서로는 『인물로 본 근대중국』(영남대출판부, 2008), 『덩잉차오평전 1·2·3』(소명출판사, 2012), 『중국근현대사: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삼천리, 2013), 『동아시아의 사형』(영남대출판부, 2014), 『문화대혁명』(영남대출판부, 2017) 등이 있다. |
| 출판사 서평 |
이 책은 상하이(上海)에서 벌어진 10년간의 문혁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상하이 문혁은 중국 전체 10년 문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특히 상층 정치 투쟁을 제외한 대중운동에서 문혁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문혁 대중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紅衛兵)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조반파(造反派) 운동이었다. 홍위병 운동은 1968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에 이르러 기본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동자조반파 운동은 1968년 ‘대연합(大聯合)’ 때 사실상 종료되었다. 그러나 왕훙원(王洪文)이 이끌던 노동자조반파만은 조직 체계를 확립하면서 핵심 세력을 유지하였고, 문혁이 지속된 10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홍위병과 노동자조반파 외에, 상하이에는 다른 성(省)이나 도시에는 없는 독특한 문혁 세력이 존재했다. 그것이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을 핵심으로 하는 공산당 상하이시위 사작조(寫作組)였다. 이들은 상하이 여론을 좌우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여론에 대해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하이 문혁은 중앙 문혁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65년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을 시작으로, 1966년 안팅(安亭) 사건, 1967년 1월 탈권(一月奪權), 1976년 무장 저항 미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하이 문혁 세력은 마오의 문혁 노선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며 그의 정치적 구상을 충실히 따랐다. 저자는 이 책의 전체적 서사를 통해 “왜?”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역사적 동기와 논리를 추적하고자 했다. 각 장(章)과 절(節)의 서술에는 모두 이러한 문제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상황이 처음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그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찾고자 하였다. 또한 역사란 개별적 세부 사실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며, 만약 이러한 세부 요소가 결여된다면 역사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공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또한 문혁 참여자의 운동 과정과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고자 했다. 그들 역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문혁 연구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단지 안팅(安亭) 사건, 『해방일보(解放日報)』 사건, 캉핑루(康平路) 사건, 1월 탈권 등과 같은 중대한 정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또 다른 연구 관심사는 노보(老保) 조직, 대연합, 관료제 정비, 변화된 대중 조직, 후기 조반파, 사작조, 제2 무장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 미쳤다. 이들은 모두 문혁의 중요 구성 요소로 연구되어야 마땅하다. 비록 사료의 한계로 인해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러한 논의가 실마리가 되어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이끌어 내고, 이들 영역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후속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한 문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역사적 기억을 되새기며, 문혁의 실제 현장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
| 책 속으로 |
왕훙원은 이렇게 상하이 노동자조반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 이후의 사실이 입증하듯 왕훙원은 자신의 당원 신분에 따른 규범으로 스스로를 제한했고, 다른 조반파 대표에 비해 보수파와 고참 간부, 특히 마오로부터 쉽게 인정을 받아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그는 조반파 내에서 위신과 지위를 높일 수 있었고, 상하이 문혁이 전국적으로 지도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44쪽)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마오는 누구의 발언도 없이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꺼내 들었다. 마오는 평소 헌법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의견을 반박할 필요가 있을 때는 헌법을 언급했다. … 마오는 공민의 결사 권리와 집회 자유에 관한 헌법 조문을 읽은 뒤 “노동자에게는 결사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헌법을 읽어 보았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인식론을 언급하며 “사실이 먼저 있고, 정책은 그 뒤에 있다”고 하였다. 마오는 장춘차오가 올바르며, 사실에 근거해 과거의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34-135쪽) 장춘차오와 왕훙원의 정치 경력에서 안팅 사건은 분명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춘차오는 마오로부터 높이 평가받으며 더욱 중시되었고, 왕훙원 역시 이 사건을 통해 문혁 기간 중 노동자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169쪽) 안팅 사건 이후에는 상하이시위 및 베이징 홍위병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노동자들이 뚜렷이 두 파벌로 나뉘기 시작했다. 공총사의 요구에 장춘차오가 서명한 사실에 대해 많은 상하이 시민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당시 마오의 결재 사실이 아직 공식적으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공장 노동자들은 앞다투어 장춘차오의 서명에 반대하였다. 국면31공장 노동자들은 와이탄에 위치한 상하이방직공업국 대문에 거대한 대자보 「장춘차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致張春橋的公開信)」를 붙였다. (211-212쪽) 『해방일보』 사건은 노동자와 학생 양 조반 세력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발생하였다. 그 이전까지 노동자조반파 조직은 학생들의 자극에 의해 형성되었고, 공총사 성립 이후에는 주로 공장 내 활동에 머물렀다. 그러나 『해방일보』 사건 이후 노동자조반파는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하며, 상하이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299쪽) 장춘차오가 직접 나서 자신을 보호해 준 것에 대해, 주융자는 깊은 감격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의 말 덕분에 나는 보수파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보호해 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내가 가장 곤란할 때 나를 지지해 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359쪽) 보수 성향의 적위대 조직은 마오가 자신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966년 11월 초, 적위대가 수적으로 조반파를 압도하고 있던 시점에 마오는 천보다(陳伯達)에게 “광공업 기업의 문혁은 기층 당 조직이 지도하거나 고참 노동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그것은 잘못된 관점이다”라고 말했다. 12월 6일, 타오주(陶鑄)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공장 내 문혁 전개에 대해 자신의 인식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그에 앞서 저우언라이 역시 이미 입장을 바꾸고 있었다. (39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