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불교가 수용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꾸준하게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가 조성되었다. 안타깝게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왕실발원 불화는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왕실발원 불화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왕실에서 시주하고 발원했던 불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시로 삼았던 만큼 태조 왕건의 숭불호법정신은 고려왕조 내내 이어졌고, 이것이 곧 왕실불화를 조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 조선시대는 건국 초부터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우며 숭유억불정책을 단행함에 따라 전 기간에 걸쳐 억불정책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세조와 문정왕후, 효령대군, 고종 등 호불적인 왕실구성원에 의해 왕실불교가 중흥되어 꾸준하게 불사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구성원이 직접 시주 발원에 참여한 예는 많지 않다. 반면 조선 전기에는 특히 왕실여성들이 불화의 발원과 시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특징이다. 왕비와 후궁, 군부인 등 왕실의 여성들은 비구니절[尼寺]인 정업원(淨業院)과 자수궁(慈壽宮) 등을 중심으로 왕과 대군 등의 명복을 빌며 불화를 발원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에서의 불사는 현저히 줄었지만 주로 왕실의 원찰을 중심으로 불화 후원이 이루어졌으며, 조선 말기에는 서울 인근 사찰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 상궁, 고위관료를 중심으로 한 왕실 불사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불사는 불교미술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질적 성장을 가져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와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했던 조선은 불교에 대한 정책과 인식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한 불화가 다수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금니와 선명한 원색이 어우러진 채색, 정치하면서도 유려한 필선,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형태 등의 뛰어난 불화가 조성된 반면, 조선시대에는 억불의 중심지였던 왕실의 발원과 시주로 도화서 화원에 의한 격조 높은 불화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내탕금을 바탕으로 왕, 비빈, 대군 등 왕실 구성원의 발원 및 후원으로 이루어진 왕실불화는 한 시대의 미술 양식을 주도했다. 따라서 왕실발원 불화는 단순히 종교미술이라는 수준을 넘어 왕실의 불교정책 및 불교에 대한 인식, 불사 후원, 불교와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왕실 불화를 통해 고려, 조선시대를 들여다본다.